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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변화, 그 두번째 키워드 : 기본기에 충실하라 - 5장 교회론(교회사역을 해야 하는 이유)
등록일 2010-03-30 조회수 1304 작성자 관리자

교사와 목회자, 또한 우리의 아이들이 꿈꾸고 이루려 하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가 우리의 교회학교를 결정짓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론이 우리의 목회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교회학교는 교회속의 또 하나의 작은 교회요, 반은 교회학교안의 더 작은 교회입니다. 교회학교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어야 교회다워집니다. 교사와 목회자가 어떠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은 어떠한 교회론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그 사역자가 어떠한 교회론을 가지고 부서나 반을 목회 하느냐에 따라서 그 부서와 반은 그 사역자가 꿈꾼 교회대로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철학의 위력입니다. 목회철학을 가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는 바른 교회론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바른 교회론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목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바른 교회론을 교사와 목회자가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바른 교회론 대로 목회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바른 교회론을 같이 일하는 스텝들과 효과적이며 인격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른 교회론, 일관성, 효과적 공유가 목회철학의 3대요소라 여겨집니다.

 

바른 교회론을 가져야 한다.

바른 교회론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목회하라.

바른 교회론을 스텝들과 효과적으로 공유하라.

 

건강한 교회학교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교회론은 사도지향적인 교회론과 지체로서의 교회론입니다.

 

사도지향적인 교회론: (성령론, 은사론)

 

자리(직제)인가? 역할(기능)인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은 사도이며 성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최초의 제사장인 모세의 형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직을 이어갔습니다. 일반백성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으며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있는 제사장이라는 중재자를 통하여 기도와 예배와 죄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전 안에 대제사장만 백성의 속죄를 위해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지르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고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가 예배하고 기도하고 죄를 고백하는 제자상의 신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성경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몇몇 택함을 받은 제사장만이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중재하던 시대는 끝이 나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사도와 제사장과 성직자로서 회복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 버리셨고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만을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유일한 중재자가 삼으셨습니다.

아직도 로마 캐톨릭은 베드로 사도가 가졌던 사도성이 교황에게만 이어졌다는 교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만인제사장임이 확증되었고 지금도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아니 성경의 본래 정신에 따라 베드로가 가졌던 사도성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에게 연연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개혁교회 안에서도 사도성이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직제개념으로 전락하였고 안수 받은 목회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 여겨지는 모순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구약에서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발탁되기에 충분한 어떠한 신령하고도 거룩한 조건을 갖추었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일했던 레위자손들도 다른 11개 지파에 비해 월등히 영적으로 뛰어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레위지파 이외의 다른 11지파들도 레위지파가 선택된 것에 대해 편파적인 차별과 편애라고 생각했다는 어떠한 말씀도 없습니다. 레위지파는 그저 제사장과 제사의 기능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무작위로 선택되었고 그 기능을 감당하기 위하여 훈련되었고 그 기능을 위해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태어날 때부터 성직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지고 훈련되어졌다는 말입니다. 남들보다 더 사랑한 차별과 편애가 아니라 쓰이는 용도와 기능이 다른 구별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에게 사도성이 주어졌음을 회복하고 사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목회자와 교사와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예비 사도가 아니라 현재, 자기 사역을 가진 사도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지향적인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아이들은 부름받은 사도들입니다.

 

상하개념의 직제와 역할구분의 직제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사가 다음세대의 아이들에게 가져야 하는 권위는 전문성으로 얻어지는 권위여야 합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의 권위는 힘이 없는 권위가 되었습니다. 직분과 상하개념의 직제에 근거한 권위, 안수 받은 목사라는 이유 만으로의 권위, 반 교사라는 자리로서의 권위는 더 이상 다음세대에게 어필 할 수 있는 권위가 아닙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성인들이 우긴다고 해서 다음세대들로부터의 권위가 확보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성인들이 어른도 몰라본다고 말을 하면 할수록 대화는 단절되고 더 외면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다음세대들이 말하고 싶은 내면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면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그렇다고 신세대들은 이러한 모든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자신이 지금 맡은 역할과 기능에 맞는 전문성은 없으면서 나이와 직분과 안수여부로서만 권위를 찾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거부하는 것뿐입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아이들이 너무나 정확한 성경에 나오는 권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가진 전문적 기능과 역할이 권위를 가져다주었지 저들이 지닌 자리와 직제 자체가 권위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높고 낮은 직분과 역할과 기능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세시대를 거치며 직제와 직분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건강한 사도성은 변질되었습니다.

제가 전임전도사로 섬기던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서 안수 받고 3년차 목사가 되어서 다시 전임전도사로 섬기던 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가 된지 3년이 되었는데도 교회 권사님들이 저를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마음에 전도사보다 목사가 더 높다는 생각을 가지고 제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목회자도 조금만 잘못 생각하면 모든 직분과 직제를 높고 낮고의 문제로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필자의 교회는 교사만 해도 천명이 넘기에 사실 누가 권사인지 누가 집사인지 초반에 헷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 언제인가부터 저의 습관 속에 이분이 권사인지 집사인지 헷갈릴 때는 무조건 권사님으로 부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직분과 자리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역할과 기능중심의 직제는 직분과 자리에 따른 사역이 아니라 은사에 따른 사역으로 기존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직제를 다시 짜는 것입니다. 교회학교를 자리와 직제가 아니라 역할과 기능 중심의 교회학교로 전환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기존의 직제 속에 익숙해 있는 교사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는 은사 중심의 사역으로 전환하는 것은 자리와 계급을 중시하는 기존 직제와 부딪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장, 부감, 총무, 팀장들은 이미 그들이 차지한 자리에다 역할까지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직제와 역할을 분리하자고 한다면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저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교회론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필자의 교회에 교역자가 기존의 부장단과는 별도로 교사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선생님들을 따로 선정하여 조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조장은 나이에 상관없이 성경을 잘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선생님들로서 담당 목회자가 성경공부 인도자로 심혈을 기울여 따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조장들과 기존 부장단 임원들과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유는 기능과 역할과 은사 중심의 직제에 의해 선택된 조장과 자리와 직분 중심의 직제에 의해 선택된 기존 조직 간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교사에게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역인데 그 가르치는 것을 나이와 직분과 상관없이 은사와 역할일 뿐이라 하여 젊은 청년교사들에게 더군다나 저들로 기존 교사들을 가르치도록 구조를 만든 것 자체가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이 갈등을 통하여 교회학교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에는 두 가지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방법은 기존의 직제와 직분에 의해 짜여진 부장단을 역할과 기능 중심으로 짜여진 조장으로 활용하여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교역자가 기존의 임원교사들과 충분한 목회적 나눔과 양육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직 전체의 마인드를 바꾸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은 있으나 일단 이렇게 이루어지면 체질적으로 견고한 양육체제가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기존의 직분과 직제에 의해 짜여진 조직을 아예 새판을 짜서 역할과 기능 중심의 조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기존의 부장, 부감, 총무라는 행정조직을 놓아두고 완전히 간사나 조장, 헬퍼 이러한 식으로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사역자들을 세워 기존조직을 대치합니다. 그리하여 상하개념이나 직제개념으로 짠 기존 조직을 자연스럽게 와해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조직은 사실 선교단체가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필자는 내년부터 토요일에 시행되는 신설 어린이 부서에서는 교사를 아예 처음부터 없이 시작하고 그 대신 기존의 부장, 부감, 총무 행정조직이 아니라 완전히 역할과 기능에 따른 구분인 간사, 순장, 중순장, 리더, 팀장 이러한 조직으로 바꾸어 시행해 볼 계획도 있습니다.

 

교회용 사도와 학교용 사도

사도지향적인 교회론은 우리의 아이들을 교사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단순한 피교육자나 어린아이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저들도 우리와 동등하게 고귀한 사도성을 부여받은 사도로서 저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과 사역지가 따로 있음을 인정합니다.

목사는 세상에서 살다 지친 성도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 다시 훈련시켜 파송하는 교회용 사도입니다. 그리고 교사는 교회학교 반 목회를 위한 반 목회용 사도이며 우리의 아이들은 학교와 세상에서 목회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세상용, 학교용 사도입니다. 목사와 교사와 우리의 아이들은 서로 같은 사도성을 가지되 서로의 기능이 다르며 사역지가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시각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저들을 대하는 대접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켜 줍니다.

만일 우리의 아이들이 사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학교 안에서 사도로서 살아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안에는 저 같은 목사도 들어갈 수 없고 교회학교 선생님들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학교가 저들이 가진 고유한 사역지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안에서 사도로서의 소명과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만 준다면 그곳에 거룩한 복음의 영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등학교용 사도는 우리 아이들만이 할 수 있고 그 연령만 가질 수 있는 거룩한 고유의 기능이요, 특권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지금까지는 학교와 세상이 출세하고 공부하기 위한 곳이었으며, 그저 그 연령대에 거쳐 가는 장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전환시켜 하나님께 부름받아 주어진 자신의 목회를 위한 사역지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실 아이들에게 학교는 가장 싫은 장소이기에 복음의 영향력을 드러내고픈 장소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입니다. 필자가 어렸을 적 귀신들은 주로 화장실, 몽달, 빗자루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거론되어 화장실 또는 창고에서 나타난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영화에서 등장하는 귀신들은 주로 학교에서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공부 못해서 죽는 장소가 되어버린 곳이 이제는 학교라는 것을 빗대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교는 치열한 경쟁 장소이며 경쟁에서 밀린 아이들이 생을 마감하는 곳이라는 처절한 외침을 학교가 이제는 귀신이 나타는 곳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는 신앙을 가진 우리아이들에게 영적으로 가장 취약한 장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들에게 영적인 황무지와와 같은 학교라는 사역지에 파송 받은 목회자임을 가르쳐주고 도전 시켜 그곳에서 사도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어 교회학교가 파송해 주어야 합니다.

저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 안에서 저들이 사도성을 가지고 믿지 않는 친구들을 섬기고 그곳에서 기도하며 예배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목회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를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만 생각하거나 단순히 거쳐 가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 학교는 영원히 영적인 복음의 불모지가 될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세상을 사역지가 아니라 그리고 자신이 사도성을 가진 목회자가 아니라 그저 밥 먹기 위해 살거나 돈벌기 위해 직장 다니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예방하기 위해서 유치원 때부터 우리아이들이 사도성을 가지고 보냄 받은 학교용 목회자임을 가르쳐주고 그렇게 살도록 도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용 사도인 목회자는 반 목회용 사도인 교사들을 훈련하면 됩니다. 반 목회용 사도인 교사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용 사도인 우리의 아이들에게 사도성을 부여하고 역할을 가르치어 세상과 학교로 파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들이 사역하고 돌아와 힘들었던 것을 나누면 이때 반 목회용 교사들은 저들을 격려하고 도우며, 기도로 힘을 공급시켜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는 것이 반 목회용 사도의 역할입니다. 이제는 목사와 교사와 우리의 아이들이 직제가 아니라 역할론을 가지고 일할 때입니다.

 

목사는 교회가 사역지이고 교사는 반이 사역지이며 아이들은 학교와 세상이 사역지입니다. 이러한 차이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사가 반이 아니라 교회를 사역지로 삼는다면 거기엔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는 교회용 사도로의 기능을 위해 전문적인 훈련을 신학교를 통하여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할 구분과 사역지 구분만 제대로 된다면 서로의 유기적 협력과 도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할과 성령님의 역할

그러면 목사나 교사나 아이들에게 동등하게 사도성을 부여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후에 구약의 종교체계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보면 마가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기도할 때 성령께서 교회에 충만히 임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소수의 그 당시 성전에서 일했던 선택받은 제사장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저들에게 방언이 터지며 각각 다른 은사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성령이 임한 하나의 결과물에 해당하지, 성령이 임하신 목적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신 목적은 성령께서 저들에게 사도성을 부여하시고 지속적인 사도성을 가지고 복음 증거하는 사역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서 성령님께 대한 이러한 의구심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12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사역기간 중 훈련받고 연단 받아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과 완전히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너희를 도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이때 이미 제자들하고 3년간이나 익숙하신 육신의 예수님이 승천하시지 마시고 같이 계시지 구지 익숙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어색하고 생소한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시겠다는 뜻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왜 성령님이 오셨어야만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핍박을 받게 되고 사도들은 각지로 흩어지게 됩니다. 저들은 이제 서로 의지할 동료도 곁에 없게 되었고 지도받을 영적인 스승도 없게 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시간과 공간 제약 없이 저들을 만나주시고 격려하시고 저들의 사도성을 가지고 사역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영으로 계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돕는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사도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일단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가면 학교라는 공간안에서는 목사나 교사인 우리들이 저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안에서 사도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목회자로서의 역할을 해내도록 사역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돕고 격려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저들이 학교 안에서 예배와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영도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목회자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성령님을 만나 교제하고 인도함을 받는 법을 배워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어디서나 언제나 저들 곁에 있어주며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자생력을 가지고 사도로서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에 따라 학교현장에서 사역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성령론에 입각한 교회교육입니다.

많은 교회학교들이 구원받았다는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증표를 얻기위해 성령사역을 하거나 어떠한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과 기적만을 구하는 성령사역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아니면 신비한 영적인 세계를 아이들에게 체험 시키코자 방언과 통변과 예언 등에 집착하는 성령사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역은 교회학교를 건강하게 이끌어 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령사역의 동기는 아이들에게 공간과 시간v제약없이 아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사도성을 부여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아이들에게 세상과 학교현장에서 사도성을 부여해 주시고 사도직을 담당케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며 이러한 이유로 교회학교안에서 성령님과 성령의 사역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장에 강한 우리의 아이들, 자생력이 강한 우리의 아이들을 양육해 내려면 성령론에 근거한 교회론을 가지고 교회학교를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에 민감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예배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의 아이들은 학교현장에서 사도성을 가지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부터 사도성을 부여받은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현장이나 세상에서 사도성을 가지고 살려할 때 지속적인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훈련받아야 하는 방법이 바로 큐티와 중보기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큐티와 중보기도는 전적으로 사도지향적인 교회학교라는 바탕에서 필요에 의해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법론입니다. 왜냐하면 큐티와 중보기도는 어떠한 기도응답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도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와 세상현장에서 목회자 없이도 성령님을 통하여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할 수 있도록 자생력을 키우는 생존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학교들을 보면 다른 교회에서 이 프로그램을 잘 한다하여 교회학교의 프로그램으로 큐티와 중보기도를 쓰는 경우는 보는데 대부분 실패하거나 지속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큐티와 중보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했던 목적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큐티와 중보기도와 리더십과 제자양육과 같은 방법론은 사도지향적인 교회론 아래 성령론에 근거하여 우리 아이들의 사도직을 회복시키기 위한 교회학교로 만들어 갈 때 쓸 수 있는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거룩한 도전

성령론에 근거한 교회학교 사역을 할 때 초기에 목회직에 대한 교사들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직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과 역할일 뿐이라는 교회론을 가르쳤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목회자나 교사나 우리의 아이들은 사역지만 다를 뿐이고 다 사도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교사들에게 충격적인 말로 다가왔나 봅니다. 이런 계기를 통하여 필자는 안수 받은 목사라는 자리를 가지고 권위를 얻으려 하지 않고 섬기는 종의 모습과 목회의 전문성을 가진 역할로서 인정되어지는 권위를 얻고자 다짐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강요된 권위와 어떤 자리가 갖는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이 버릇이 없고 어른을 모른다고 서운해 했으며 저들을 혼내서라도 권위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들의 말이 맞는 말이었습니다. 어른이 어른다워야, 목회자가 목회자 다워야 자원하는 존경과 권위에 대한 순종이 나오지 않는 거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정말로 목화자들과 교사들이 자신이 가진 직제와 자리만으로서 대접받는 존경을 원하시는지 아니면 참다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존경을 원하시는 것인지에 대해 물어볼 때는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필자가 가르친 대로 교사들과 아이들은 성령님에 대해 민감해지기 시작하였고 자생적으로 성령님과 긴밀한 교제를 스스로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님에 대하여 주관성을 가진 것과 약간 신비성에 치우친 경향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결국 충분히 예상했던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저희 교회학교는 공과의 본문과 설교의 본문을 같이 하는 교육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은 제가 전할 다음주 설교 본문을 가지고 일 주일 내내 말씀 묵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열심히 묵상하는 가운데 본문을 통해 성령님께서 영감주시는 내용들을 제각기 적어가지고 제가 전하는 설교시간에 들어오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솔직히 점점 더 부담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교사가 저에게 정면으로 교회학교 인터넷 게시판을 통하여 이러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본문을 자신이 일주일 내내 묵상하고 난 후 주일에 설교를 들었는데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성경 해석과 자신이 성령님을 통해 직접 받은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고 끝내었으면 다행인데 “목사님의 영성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말씀묵상하지 않던 교사들에게 말씀묵상을 시키고 말씀묵상 속에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킨 것도 저였고 성령님에 대해 무지했던 교사들에게 성령님에 대해 알려드린 것도 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로 가르친 부분에 대한 공격을 받고 그것도 게시판에 글이 올랐으니 저의 반응이 어떠할는지가 모든 교사들과 아이들의 초미의 관심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댓글에다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묵상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저의 묵상과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앞으로 많은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깊은 영성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때는 참 자존심 상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썼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쓰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때 “당신의 묵상이 틀린 겁니다. 제가 만난 성령님이 옳습니다. 저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목회자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이 상황을 지켜보았던 우리아이들은 아마 자기 스스로 하는 묵상을 포기하고 제가 일방적으로 전하는 말씀에만 의존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교사는 저에 대한 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분주하고 바빠서 깊은 묵상할 시간 없이 쫓기듯이 준비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저에게 말씀에 대한 전문성을 위하여 더 깊은 묵상과 연구하라는 도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목사의 권위는 목회적 전문성으로 교사의 권위는 반 목회에 대한 전문성으로 승부 거는 날이 올 때 성령의 사역이 꽃피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아이들 세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권위와 존경은 전문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격체이신가? 수단과 도구인가?

교회학교에서 성령님에 대해 가르칠 때 성령님을 신비적으로 몰아간다거나 아니면 아예 성령님을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만들면서 어떠한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르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능력과 느낌과 감화 감동, 힘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오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을 도구로 이용하거나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에게 접근하는 사단의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령님을 과도한 감정이나 능력으로만 접근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인격적인 성령님을 만나고 교제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결국 자신의 현재 감정에 근거하여 성령님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둘째는 이와는 정반대로 성령님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게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아이들이 삶의 현장에서 무기력하게 세상에 이끌려 사는 원인은 바로 성령님과 긴밀한 교제가운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 아이들이 구원받고 예수믿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성령님과 교제를 통하여 사도직이 회복되어 세상속에서 능력있게 사역하며 당당하게 사는 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무시하면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있다고 가르치거나 성령의 대치물을 만들어서 아이들을 현혹케하는 수법을 씁니다.

 

성령님은 힘과 능력과 신비함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분의 일부분의 속성일 뿐이며 성령님의 온전한 실체는 인격성이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삶의 현장에서 우리아이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영은 성령님이 십니다.

 

성령님은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인격체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병이 났을 때에만 치유를 위해 등장하시거나 우리가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에만 방언과 같은 신비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분이 아니며 수단과 도구로서의 영이 아니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하나님께는 예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성령님께 예배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같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영이십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도록 성령님은 직접적으로 우리를 돕고 격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격체이신 성령님께 예배하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에 예배의 대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인격적 교제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에 제일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찾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함께 거하고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일 시키기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이 아니라 교제와 친밀한 만남을 위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미신이 다른 점입니다. 무당들이나 사교의 교주들을 보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매일 구하는 것이 물질이나 건강이나 현세적인 결과물이지 친밀한 관계를 구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저들 스스로 자신이 섬기는 신이 비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말하는 증거입니다. 맨날 하는 말이 “정성이 부족해” 라고 돈이 부족함을 질타하거나 자신의 신이 돈 액수에 따라 응답이 달라진다는 것을 암시하기도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이 섬기는 신이 돈의 액수에 따라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시니으로써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 신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하지 ”옥황상제가 나를 사랑하셔, 돈을 둘째 치고 우선 친밀한 교제를 원하셔“ 이딴 식으로 말하는 무당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절대적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의 위대한 사역이나 업적이 아니라 친밀함입니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거하여 성령님과 내가 하나 되어 성령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내 뜻이 성령님의 뜻에 맞추어지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충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님을 우리의 아이들이 어떠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지 말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내안에 계신 성령님께 모든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여쭈어 보아 삶의 지배권과 선택권을 맡기는 법과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령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은 큰일, 큰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지배하심입니다.

 

성령님과 교제하면 할수록 친밀해집니다.

그리고 그분을 닮아갑니다.

 

교회학교에서 대표기도하시는 어른 교사들을 보고 어린아이들이 저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온 우주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 뭐예요?” 제가 길게 설명해 주었더니 대뜸 “목사님 그 선생님은요 하나님하고 하나도 안 친해 보여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말인즉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 아빠더러 “지존하신 아버님, 일향만강하시며 옥체보전하시고 진지 흠향하옵소서”라고는 말하지 않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성령님을 너무나 고귀하게 모셔두고 절하기만 하며 그 앞에서만 서면 떨고 부복하는 그런 만남이 아니라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나누고 고민도 말하며 상담할 수 있는 그런 친근한 분으로 우리아이들이 만나야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안심하고 성령님과 항상 함께 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 그분과 닮아져갑니다. 같이 거하며 살다 보면 서로 닮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어떤 부부를 보면 살면 살수록 닮아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어떤 부부는 살면 살수록 점점 달라져 가는 부부도 보았습니다. 사랑하면서 살면, 살면 살수록 서로 닮아져 갑니다. 그러나 미워하면서 살면, 살면 살수록 달라져 갈 것입니다. 성령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과 생각이 성령님을 닮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사랑하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아내와 필자는 결혼 초기에 너무나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저는 책을 흩뜨려놓아야 설교 준비할 때 영감이 떠오르는데 제 아내는 정리해놓는 은사가 있습니다. 저는 흩어놓으면 제 아내는 결벽할 정도로 깔끔히 정리해 놓습니다. 제가 치약을 중간부터 푹 짜며 쓰면 제 아내는 끝에서부터 말아서 씁니다. 이렇게 살기를 10년 지난 후에 서로에게 변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집에 늦게 들어가 보면 제 아내는 설거지도 하지 않고 퍼질러 자고 있고 제가 답답하여 정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설명할 수 없는 변신이 일어난 원인은 서로 사랑하며 살기 때문에 서로 닮아 간 것입니다.

만일 애완견하고 살다가 개가 너무나 닮고 싶어서 개가 먹는 사료를 먹어보고 싶다거나 네발로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보신 분이 있다면 빨리 병원 가서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개는 같이 살지만 개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는 인격성이 없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와 같이 살면서 사랑해야 저절로 닮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는 사람을 닮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집에 가보면 개가 정말로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다가 손님이 와서 자기한테 인사 안하면 화내서 짖는 사람 같은 개를 본적이 있습니다. 개 정체성을 잃어버린 개입니다. 저도 개를 좋아해서 키워 본적이 있는데 너무 좋아하니까 아들놈이 “아빠는 개 아빠 같아요.” 라며 저에게 개 아빠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아빠는 개를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니 “개 아들 같아요.” 라고 말했다면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입니다. 개가 사람을 닮아가 “사람 같은 개”는 있어도 사람이 개를 닮아가는 “개 같은 사람”은 없으며 개 아빠라는 말은 통해도 개 아들이라는 말은 허용되지 않는 것은 바로 개에게 인격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고, 교제하면 할수록 닮아져간다면 얼마나 세상에서 능력 있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제한된 만남이 아니라 삶의 현장 그 어디서나 언제나 만날 수 있고 물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존재이신 성령님이 저들 안에 이미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아이들이 안다면 얼마나 안심해 하고 얼마나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까 생각해 보면 가슴이 뜁니다. 아침이면 일어나 “성령님 좋은 아침이예요. 잘 주무셨어요?” 저녁이면 “성령님 오늘 하루 잘 보낸 것 다 성령님 덕분이에요. 절 도와 주셔서 감사해요,“ 이럴 우리 아이들을 꿈꾸어 봅니다.

 

성령님께 복종할 때 성령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됩니다.

성령충만함이란 성령의 지배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아이들의 삶에 나타나려면 성령님께 복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초대교인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이란 칭호를 갖게 된 비결은 성령이 저들에 임했고 그 성령님께 순종하고 삶의 주도권을 넘겨드렸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 그리그도인이라는 칭호와 능력이 우리아이들에게 이 시대 가운데 삶의 현장 속에서 완벽하게 재현되기를 소망한다면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와 성령님께 철저히 복종하는 법을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학교 안에서 성령충만함을 가르칠 때 성령충만함을 성령의 능력이라던가 성령의 은사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해석은 성령충만을 내안에 계신 성령님께 삶의 주도권과 선택권을 넘겨드리는 상태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매일 매일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마다 자신의 내면에 계신 성령님께 묻고 성령님이 말씀하시며 영감주시는 길과 방법대로 사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이 내안에 계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나 내안에 이미 계신 성령님께 지배권을 맡겨드리는 것은 나의 몫이라는 사실을 구분시켜주어야 합니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은사

성령님께서는 우리아이들을 영적 전쟁터인 세상에 보내실 때 무기이자 사역의 도구를 들려 보내시는 데 그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재능과는 달리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미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에게만 위로부터 아래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은사는 서로 다르나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 보면 같은 성령으로 주어지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 사람의 부족한 것을 서로 돕고 보완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시는 다양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사는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일하라고 주신것이니 일하는데 써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하나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개를 주시는 중복성을 가지고 있으며 은사는 무한합니다. 은사는 변화하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능과 직능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주신 은사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소멸하는 소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갈 때 탁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가지는 재능에다 성령님이 사역을 위해 주시는 은사를 더했기 때문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당해 낼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즐기는 사람은 미친 사람을 당해 낼 수 없고 미친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미쳐서 일하는 사람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선천적인 재능이 없다하여 낙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은사가 있기에 명확한 사역과 목적을 정하고 성령님께 그 사역을 위한 은사를 구한다면 풍성한 은사를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부목사님들이 MBTI검사를 통하여 성격을 알아 본적이 있는데 거의 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나타난 점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활발하고 적극적이며 사교적인 분들이 정작 저들의 내면의 성격은 내성적이라 검사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성령께서 후천적으로 주신 은사가 따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는데 모든 은사 가운데 월등히 우선되는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다양한 은사를 소개하고 난 다음 13장에서 집중적으로 사랑의 은사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랑의 은사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사랑의 은사 없는 방언과 통변과 가르치는 것과 섬기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은사가 됩니다. 사랑의 은사에다 다른 은사를 더하는 것입니다.

 

사도지향적인 교회론은 성령지향적적인 교회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성령지향적인 교회론은 은사지향적인 교회론으로 이어집니다. 은사지향적인 교회론을 가진 교회학교는 사랑의 은사를 기본으로 무장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사도직을 가진 사도로 부름 받았으며 저들의 사역지는 세상과 학교이며 저들에게 사도성을 부여하시며 삶의 현장에서 사도직을 살아가도록 돕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 우리아이들을 보내실 때 무기를 들려 보내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님께서 은사를 부어주실 때 사랑의 은사를 최우선으로 주십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교회론을 전제로 우리의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가르치고 체질화 시킨다면 건강한 교회와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 확신합니다.

 

 

몸과 지체로서의 교회론

 

자리인가? 역할인가?

사도지향적인 교회론과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교회학교는 성령지향적 교회론과 은사지향적 교회론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은사지향적인 교회론은 지체론에 근거한 교회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12절 이하에 보면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몸은 하나이나 각각의 지체가 있어서 지체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잘 해내어 하나의 온전한 몸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표현을 통하여 교회를 몸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7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에서 보면 알듯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시며 우리들은 각각의 지체로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지체가 각각의 고유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서로를 섬겨주어야만 합니다.

교회학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며 구성원인 목회자와 교사와 아이들은 지체들입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자이며 아이들은 가르침을 받는 자라는 학습중심의 구분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지체로서의 교회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교사들과 더불어 몸 된 교회 안에 꼭 필요한 각각의 지체들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여러 명 중에 한명으로 보는 것은 교회론적으로 맞지 않는 시각입니다. 오히려 이 아이는 교회학교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지체이며 자기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목회자와 교사가 알고 그러한 대접을 우리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진 고유의 역할을 아이들이 찾아 알아내어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회학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자신이 교회학교 안에 꼭 있어야 하는 지체이며 그 역할을 해 주어야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학교가 온전해 진다는 것을 우리아이들이 안다면 주인의식을 가지고 관람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설 것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저에게 솔직히 고백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의 반 아이 가운데 너무나 학습 분위기를 망치고 말썽부리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한번 떠들면 공과공부를 진행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서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아이가 아파서 결석했을 때 오늘 이 아이가 안 나와서 공과공부가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는 안 나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기에게 있었노라는 가슴 아픈 고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교사와 성경공부를 같이 하면서 지체로서의 교회론을 가지고 나누었을 때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어떤 지체는 꼭 필요해 보이는 지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지체는 꼭 없어도 될 것 같은 지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필요 없는 지체는 없습니다. 오늘 그 아이가 나오지 않은 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지체 하나가 없어진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 아이가 결석함으로 인해 우리의 몸은 결국 불구자가 된 것과 같습니다. 그 선생님은 성경이 말하는 지체의식을 가지고 우리아이들을 보게 되었고 아무리 힘들게 하고 말썽부려도 저들을 지체로서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회복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각각의 지체들은 우열이 없습니다. 어떠한 지체가 눈에 더 띄인다거나 머리가까이 있다하여 더 소중한 지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놓여진 자리로서 그 지체의 중요성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지체가 가진 교유의 역할과 기능이 중요성을 결정합니다. 지체의 특정한 역할은 그 지체만이 감당할 수 있고 그 지체가 그 역할을 감당해 주어야 온전한 몸이 되기에 모든 지체는 다 중요한 것입니다.

어릴 적 생각해보면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제 자식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던 것이 기억납니다. 분명 축복받아 잘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들어 있겠지만 꼬리가 우열 면에서 열등하다는 생각은 교회론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꼬리의 역할을 감당해 주어야 하며 몸 된 교회는 그 꼬리의 역할을 하는 지체를 소중히 여겨주는 교회학교가 건강한 교회학교입니다.

많은 교회들을 보면 교회안의 자리를 가지고 박 터지게 자리싸움하는 것을 보는데 이는 교회론의 결핍에서 오는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교회학교라고 해서 이 싸움에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지체론으로 다시 재정립하면 자리 개념에서 역할 개념으로 교회학교의 체질이 전환 가능합니다. 자리를 가지고 위세부리거나 자리를 가지고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은 교회학교 자체를 약하게 만들어 가며 아이들에게 혐오감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오히려 부장은 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조장은 조장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여 다 힘을 합하여 자신의 기능과 역할과 은사를 가지고 교회학교를 섬기며 높고 낮고의 우열로 따지지 않고 각자의 역할로서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만 있다면 성경이 꿈꾸었던 건강한 교회학교가 회복될 것입니다. 서로 각자가 다른 지체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자신이 가진 역할과 기능을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고 돕고 보완한다면 얼마나 근사한 교회학교가 되겠습니까?

 

교회는 퍼즐이다?

만일 교회를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에 비유한다면 퍼즐로 비유하고 싶습니다. 퍼즐은 수백 개의 조각조각이 서로 제 자리에 맞추어져야 온전한 그림이 완성됩니다. 만일 퍼즐 한 조각이 사라졌다면 그 그림은 영원히 미완성 그림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러한 퍼즐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바라본다면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제각기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과 기능을 다하여 거대한 퍼즐맞춤 안에 그림이 선명히 드러나듯이 건강한 교회가 재현될 것입니다.

 

지체는 서로의 고통을 나눕니다. 다리가 아픈데 팔이 웃는 법이 없습니다. 온 지체는 신경이 통해져 있으며 같은 피가 흐르기에 남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서로 다른 곳에 있기에 분리되어 보이지만 한곳에 상처가 나보면 금방 각 지체가 한 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리에 피가 나면 온 몸 안에 흐르던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는 성령과 같아서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성령님은 하나 몸임을 계속해서 증거해 주십니다.

만일 자신의 얼굴을 향해 야구공이 날아오는데 손이 평상시 얼굴과 친하지 않다고 해서 손으로 막아주면 손이 아플까봐 막아주지 않아서 눈이 야구공에 맞아 시퍼렇게 된 것을 보고 재미있어 하는 손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일 길을 가다가 얼굴에 있는 눈이 깊게 파인 진흙 구덩이를 보았는데 평소에 친하지 않는 다리가 미워서 다리에게 알려주지 않아 다리가 구덩이에 풍덩 빠져 진흙투성이가 된 걸 보고 고소해 하는 눈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일은 몸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데 교회학교 안에는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픕니다. 몸은 지체의식이 있는데 교회학교는 지체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련회에 가보면 첫날에는 아이들이 같이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자고 지내야 하기에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난리입니다. 미워하기도 하고 말싸움도 하고 편을 나누며 서로 얼굴 붉히면서 반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회 가운데 성령으로 하나 될 때 저들이 깨닫는 게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옆에 친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고 나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어서 서로의 사이가 형제이며 지체임을 알게 되며 서로의 동맥과 정맥에 그리스도의 한 피가 흐름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저들의 눈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째쯤 되면 서로 미워하던 아이들이 끌어안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은혜의 도가니가 됩니다. 이러한 기적은 성령님이 주시는 하나 됨과 지체의식의 회복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학교 사역 가운데 몸과 지체로서의 교회론을 일깨워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과 긴밀한 교제와 기름 부으심 가운데 형제 됨과 지체의식이 강력하게 실천될 것입니다.

 

교회놀이

어린아이들이 치고박고 멱살잡고 싸우며 노는 것을 본 어른이 지나가다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저희들 지금 소꿉장난하며 놀고 있는거예요” 라고 말 하길래 “무슨 소꿉놀이인데 싸우며 놀아?” 물었더니 “교회놀이요”라고 대답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네 동네 교회가 매일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을 본 아이들이 교회놀이를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며 놀았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교회놀이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소꿉놀이를 할까 너무나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교회소꿉 놀이를 보면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답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치부와 유년부 아이들에게 성경학교 활동시간에 교회놀이를 해 보라고 주문했던 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교회학교의 아이들은 예배를 만들어서 기도하고 설교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놀았습니다. 아이들은 교회는 우리끼리 예배드리는 곳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교회학교 목회를 통하여 우리의 아이들이 언젠가는 서로를 사도로 칭하고 예배후 파송식을 베풀어주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는 교회놀이 하며 놀기를 꿈꾸어 보고 그런 비젼으로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들더러 교회를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도화지 가득 교회를 크게 그리고 그 안에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가득 채우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 아이들더러 교회를 그리라고 하면 언젠가는 지구를 도화지 가득 그리고 자신의 교회를 점으로 찍어 교회를 그리는 환상을 가집니다. 온 열방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라는 이미지를 그렇게 점으로 그리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람 몸으로 그려놓고 너는 팔이고 너는 다리이고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각각 이름 붙이는 날을 꿈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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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종말론) 4) 변명할 여지가 없다 - 종말  관리자 10-02-17 1224
49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종말론) 3) 유사품에 주의합시다 - 잘  관리자 10-02-17 1105
48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종말론) 2) 기왕이면 주님이 오시죠 -  관리자 10-02-17 1132
47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종말론) 1) 끝은 반드시 있다 - 개인적  관리자 10-02-17 1426
46 사단이 주는 나쁜 선물(죄책감) 5) 죄의식과 죄책감은 다르다  관리자 10-02-17 2031
45 사단이 주는 나쁜 선물(죄책감) 4) 그래, 나 염치없다, 왜? -  관리자 10-02-17 1956
44 사단이 주는 나쁜 선물(죄책감) 3) 배알도 없는 하나님 - 하나  관리자 10-02-17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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